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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월호 이야기
2015년 03월 16일 (월) 16:46:16 이가현 gyozi@sogang.ac.kr
나의 세월호 이야기 ‘가만히 있으라’ 이가현(정외 12학번) 세월호 참사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의 선장이 승객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시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승객들을 구조하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라고 하는 사람이건, 안개에도 불구하고 출항했던 승무원의 책임라고 하는 사람이건, 가장 중요한 시간에 대피를 할 수 없게 만든 그 “가만히 있으라”라는 한 마디가 수많은 사람들을 바닷 속으로 수장시켰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 세월호가 침몰한지 2주 후인 4월 30일, 배 안에서 구조된 사람도 한명도 없고, 수습된 시신조차 단 한 구도 없었다. 일반적인 사람은 물속에서 2주를 버티는 것은 불가능하다. 침몰 당시 탈출하지 못했던 승객들이 모두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게 손도 한 번 못써보고 그대로 300명이 배 안에 갇혀 바다로 가라앉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한 명도 구하지 못했는지 누구한테라도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나 참혹한 현실에 더 이상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유모차를 끄는 엄마들이 ‘우리 아이들을 살려 달라’면서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노란 손수건을 달고 행진했다. 정말 우리들은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 경희대학교 학생인 용혜인 씨가 청와대 게시판에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자며 첫 침묵행진을 제안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이 사회의 말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거리로 나와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자는 제안이었다. 청와대는 게시판에 올라온 용혜인 씨의 글에 개인정보가 담겨있다는 이유로 글을 지웠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용혜인 씨에게 국민들의 시선이 더 집중되도록 만들고 시민들을 더 화나게 만든다. 4월 30일, 침묵행진은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2시에는 홍대, 4시에는 명동, 6시에는 시청에서 행진이 진행된다고 공지가 올라왔고, 나와 함께 침묵행진에 참여하기로 한 학생들도 우리 학교 곳곳에 “우리 정말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요”라는 제목의 글을 붙여서 침묵행진을 알렸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고, 실종자들이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의미인 노란 리본을 묶은 국화와 마스크를 가지고 홍대로 갔다.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는 50명 정도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용혜인 씨가 발언을 시작했다. 용혜인 씨는 단원고등학교가 있는 경기도 안산이 고향이라고 했다. 20년 넘게 안산에서 살았고 서울로 대학을 왔다. 마이크를 잡은 그녀는 친구들의 동생이 생떼 같은 목숨을 잃었다며 울먹였다. 그리고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것 아니냐면서 수백 명을 수장시킨 그 한 마디 “가만히 있으라”가 적힌 피켓을 들고 행진하자고 했다. 용혜인 씨를 따라 행진이 시작되었다. 행진이 지나갈 때마다 소란했던 홍대가 조용해졌다. 안산으로의 행진 침묵행진은 안산으로까지 이어졌다. 3호선을 타고 고잔역에 내려서 아무도 없는 침침한 거리를 피켓을 들고 걷었다. 그 길로 안산 합동분향소까지 걸어갔다. 합동분향소에 도착한 후 피켓, 마스크, 국화를 보이지 않게 하고 들어갔다. 입구에서 유가족 분들이 검은 옷을 입고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고 계셨다. 분향소에 줄을 서서 입장했다. 나는 압도되었다. 수많은 얼굴들이 체육관 넓은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일렬로 서서 헌화를 한 뒤에는 길게 줄을 서서 영정사진을 둘러보는 시간이 있었다. 영정에 담긴 얼굴들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싶었다. 한 얼굴이라도 스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영정사진은 너무 많았고 침묵행진을 할 때 보다 더 천천히 걸었던 나의 걸음은 너무 빨랐다. 그 얼굴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고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날, 합동분향소를 나와서 멀리 떨어진 곳에 침묵행진을 했던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모여서 조용하게 소감을 나누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소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100m나 떨어져 있던 합동분향소건물에서 하늘을 찌르는 통곡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비명과 울음은 얼마간 계속되다가 잦아들었다. 합동분향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단원고등학교 졸업생이 말해주길, 단원고 희생자의 어머니가 딸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을 하시는 소리였다. 자원봉사자의 말을 듣고 있던 우리는 모두 고개를 떨궜다. 자식 잃은 어버이날 5월 8일 어버이날,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분들이 KBS 보도국장의 사과를 받기 위해 안산에서 여의도로 오셨다. 세월호참사를 교통사고와 비교하며 물의를 빚었던 KBS보도국장이 사과를 거부하고 유가족들을 경찰병력으로 막았을 때, 옆에서 울고 있는 청년들을 달래는 희생자 유가족들을 보았을 때, 영정사진에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뽀뽀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장면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가족 분들은 결국 사과를 받지 못하고 대통령께 읍소하기 위해 여의도에서 청와대로 가기 위해 버스에 타셨다. 나도 유가족들과 함께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그 자리에서 나는 생전 느껴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유가족들은 온통 담요를 두르고 품에는 영정사진을 앞으로 하여 안고 있었다. 그분들의 표정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참담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50명이 탄 버스이지만 오직 정적만 감돌았다. 청와대에 도착하기 전에 광화문에서 버스는 멈추었다. 경찰들이 버스가 청와대쪽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다. 영정을 안은 유가족 분들과 시민들이 모두 내려서 청와대로 걸어갔다. 큰 길은 뚫려있지만, 큰 길에서 청와대쪽으로 난 작은 골목들은 모두 경찰들이 빼곡히 막고 있었다. 청운동사무소에 도착했다.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청와대였다. 대통령님을 만나서 단 10분이라도 이야기 하고 싶다는 유가족 분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은 몇 대의 경찰버스가 겹겹이 막고 있었다. 경찰버스 양쪽의 공간 역시 경찰들이 벽을 이루고 막고 있었다. 유가족들은 거기에 앉았다. 몇몇 분들은 버스 옆을 막고 서있는 경찰들 앞에서 영정을 보여주며 무릎을 꿇으셨다. 그리고 통곡했다. 자식 잃은 부모를 경찰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이 나라가 미웠다. 그 날 밤은 유난히 추웠고 모두가 오들오들 떨며 밤을 샜다. 시민들은 밤이 깊어지자 하나 둘 씩 유가족들과 함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 곳에서 밤을 새면서 너무나 충격적인 영상을 봤다. 단원고 희생자들이 가지고 있던 휴대폰에 배가 침몰할 당시에 찍은 동영상이 있었다. 유가족들이 그 영상을 틀어주셨다. 배는 기울어져있고 소녀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기울어진 배에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유가족들의 통곡이 그 뒤를 이었다. 또 다른 아주 짧은 영상, 주위는 깜깜하고 여고생 두 명이 아무 말도 없이 구명조끼를 입고 앉아서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동영상을 틀어 주었던 유가족은 차마 그 영상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숙이고 귀를 막고 있었다. 추모와 연행 침묵행진은 계속되었다. 언론의 주목도 많이 받았고 용혜인 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는 신호등을 건너려는 침묵행진은 경찰에 의해서 막혔다. 경찰들에 둘러싸인 침묵행진 참가자들은 말없이 국화와 피켓을 높이 들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도 경찰들이 길을 터주지 않자, 그 자리에 앉아 자유롭게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추모하는 것이 불법인지, 아무런 말없이 천천히 걷는 것이 불법인지, 그렇다면 이 세상에 불법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왜 슬퍼하는 것조차 통제당해야 하는지 울분에 찬 발언들이 이어졌다. “가만히 있으라” 는 말이 결코 세월호 안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몸으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경찰은 두 시간여가 지난 후에서야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국민의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를 자의적으로 억압한 경찰의 초법적 대응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5월 18일,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은 청와대로 향한다. 그러나 경찰은 청와대로 향하는 한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았다. 청와대로 가서 책임을 묻겠다는 시민들, 그리고 그 걸음을 필사적으로 막고 시민들을 방패로 떠미는 경찰들은 서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어있었다. 방패에 밀려 우르르 넘어진 시민들은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멍이 들기도 했다. 침묵행진 제안자인 용혜인 씨가 그 날 울먹이며 경찰들에게 호소했던 말은 이것뿐이었다. “추모하는 게 죄라면 저를 잡아가세요” 그 날 역시 두 시간쯤 지나서야 경찰은 길을 터주었지만 우리는 청와대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광화문광장에서 포위된 시민 100명과 용혜인 씨는 세월호를 기억하라고 외치며 그대로 서울 각 구의 경찰서로 연행이 되었다. 나도 이때 처음으로 연행이 되었다. 연행되는 과정에서 기죽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잡혀오니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했다. 경찰이 불법집회 해산명령을 했지만 해산하지 않았다는 것이 내가 잡혀온 이유였다. 처음으로 유치장에 갇혔다. 유치장 안에서 텔레비전으로 대통령담화를 봤다.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고 관피아를 척결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국가안전처를 신설하여 민간과 협동하여 안전한 국가를 만드는 데에 힘쓰겠다고 했다. 담화의 마지막은 대통령의 눈물 한 방울, 그리고 그 것을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죽을 때 까지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은 신파극이었다고 생각한다. 청와대에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시민들을 철창 안에 가둬놓고서 마치 대단한 결심을 한 양 언론에 나와서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정말 진정성 없어보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되어갔다. 6월이 되었는데도 아직 시신들이 수습되지 못했고, 잠수사 한 명이 잠수병으로 숨을 거두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잠수사들은 자비로 잠수비용을 댔고, 숙식도 제대로 해결이 해주지 않았다. 실종자를 기다리는 팽목항은 지원이 끊겨서 힘든 상황이라고 했다. 끝까지 실종자 구조에 전심전력을 다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역시 말뿐이었다. 그렇게 많은 비판을 받고도 두 달이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수많은 보수인사들의 막말에 의하면 자식 잃은 사람들이 ‘종북좌파’가 되어가고 있던 와중인 6월 10일, 용혜인 씨는 처음으로 “가만히 있으라” 침묵행진의 청와대행을 공지한다. 6월 10일 저녁, 시민들이 총리 공관 앞으로 모여들었다. 경찰은 이번에도 역시 단숨에 시민들을 에워싸고 해산명령을 내렸다. 시민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뭉쳐있는 청년들을 한 명씩 힘으로 뜯어서 연행해가는 경찰들은 폭력 그 자체였다. “우리가 지금 그냥 넘어가면, 다음엔 400명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겠지요. 500명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겠지요.” 한 청년의 외침. 이 한 문장이 그 날 가장 기억에 남는 발언이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유가족 분들께 서명 포맷과 대국민호소문을 받아서 서강대학교를 지나는 학생, 교수, 청소노동자, 직원들에게 서명을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았다. 대국민 호소문은 대자보로 뽑아 학교 곳곳에 붙였다. 공강 시간에, 아니 수업 시간을 빼서라도 서명운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서명이 모였고 서강대학교를 지나는 약 1500명의 시민들이 ‘이런 건 해야지’ ‘좋은 일 하시네요’라면서 기꺼이 펜을 들었다. 서명운동을 하면서 받은 간식을 다 먹지 못해 옆에 쌓아둘 정도로 세월호참사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고, 그 진상이 밝혀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또한 간절했다. 그러나 대자보로 붙였던 대국민 호소문이 정체불명의 사람에 의해 찢어지기도 했다. 평소에도 손으로 직접 쓴 대자보들이 한 번에 모두 떼어졌던 적이 있었지만 그 때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호소를 무참하게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고 약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 두려웠다. 성공회대, 한신대 교수와 학생들의 세월호참사 시국선언이 발표되었다. 곧 이어 다른 대학 총학생회에서도 시국선언이 발표되었다. 서강대에서도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을 위해 열심히 행동했던 학생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준비했다. 머리를 맞대고 써낸 글을 발표하고 함께 연명할 학생들을 인터넷으로 받았다. 처음에는 416명의 서명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연명이 잘 되지 않아서 250명이 조금 넘는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연명한 사람들의 학번과 이름을 모두 공개했다. 그런데 자신은 여기에 동의한 적이 없다며 대자보마다 자신의 이름을 도려내는 사람도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시국선언에 동참하지 않은 학생들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 먹고살 길이 막막하여 서명 하나라도 조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보니, 어느새 방학이 되었다. 누군가는 이윤 때문에 희생되어야 하는 이 시스템에 저항하고 희생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밀양으로 농활을 떠났다. 세월호 참사 행동의 연장선이었다. 농활 마지막 날, 주민 분들과 잔치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친구가 술에 많이 취했었다. 학교와 거리에서 함께 행동했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평상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울먹였다. “어떻게 300명이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지?” 나는 그날 그 친구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약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 끝에 흘렸던 눈물, 한숨과 탄식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국민을 대해야 할 여당이, 청와대가, 유가족들이 거리에 나와 밤을 새고 단식농성을 하는 데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있다. 이 나라는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자식잃은 아비에게 돈을 몇 푼 더 받으려고 그러냐고 비난하고, 금속노조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불순하다고 오명을 씌우는 병든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앞으로 얼마나 긴 싸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누구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기에 끝까지 세월호참사 희생자, 유가족들과 함께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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