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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식탁의 침묵에 대한 구성과 해체
2014년 04월 30일 (수) 22:29:58 한대희 없음
돌이킬 수 없는 식탁의 침묵에 대한 구성과 해체 한대희(국제대학원 국제관계학) 들어가며 현대사회에서 가정의 식탁에 대한 의미는 점점 변질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식탁’이 공간적으로 어떤 핵심적 의미를 가질까? 그곳은 아마도 ‘식사의 즐거움’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가정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에 감사하여 인간다운 인간으로 진화하도록 도와주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곳은 아닐까? 그런데 가정의 식탁은 왜 공간적으로 변질되어가며 이 핵심적 의미를 점점 벗어나고 있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식탁을 어떻게 재해석해야 할까? 이 질문이 본 비평이 여러 문학작품과 영상 장르에 등장하는 ‘식탁’의 관찰과 해석을 통해 응답하고자 하는 핵심적 질문이다. 아마도 식탁을 수놓는 음식에 대한 의미가 변질되어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지 모른다. 나 자신의 입맛과 건강을 고려해 치열한 사회적 생존을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웰빙’과 ‘힐링’으로 가장된 새로움을 추구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움을 추구함에 있어, 음식과 식탁은 그저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 부터인지 ‘웰빙’과 ‘힐링’ 역시 경쟁이란 용어 못지않게 사람들이 남용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슈퍼 푸드’를 섭취하라는 미디어의 강권의 숨은 메시지는 초 고령화 사회에 남들보다 강하고 오래 살 수 있는 신체를 가지도록 명령하는 그리스 시대의 ‘스파르타’ 망령의 부활이다. 생명에 대한 성찰보다 어떻게 적자생존 할지 모색하는 것이 인간의 진화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인간다운 인간에서 생물학적 인간으로 변환되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애석한 미화일지도 모른다. 식탁은 예로부터 가정에서 꽤 강력한 사회화라는 순 기능을 담당해왔다. 식탁은 음식을 섭취하는 공간임은 물론, 인간과 인간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나누는 사회화의 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화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생존’ 그 자체가 중요한 덕목인 현대인들의 시각에서는 가정의 식탁에서 식사의 즐거움을 나누는 일은 사치가 되어 버렸다. 몇 년 전 한 정치인의 ‘저녁 있는 삶’이란 정치적 구호가 사람들에게 꽤 매력 있는 언어로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식사의 즐거움이 가득한 식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 본연의 회귀 본능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정의 식탁으로 회귀하여 탁자로 앉아 나의 소중한 가족들과 ‘식사의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 정말로 큰 사치이던가? 오늘날의 식탁과 우리들의 가족만이 일방적으로 무기력하다고 논증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일지도 모른다. 집단의 제도, 문화, 그리고 사회의 거대한 파급효과는 심지어 가족의 일상적인 삶에도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사회가 가족에 끼치는 영향이 무릇 가족의 파편화를 이끌어내는 부정적인 기제로 인지되어야 한다면, 과거의 가족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의 구조적 요인이 과연 가족의 지속가능성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 또한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가정의 식탁 역시 매우 오랫동안 그 공간적 의미가 변동되어 왔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마냥 이 식탁을 단순히 ‘사회화’의 관점에서 인간과 인간의 공유의 장으로만 인식하거나 혹은 식탁을 무기력한 고독의 장으로 간주 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한다면, 식탁의 다른 이면을 모두 덮어버리는 행위가 되어버린다. 결국 지난한 세월동안 우리 가족들의 집에서 버텨온 말 없는 식탁의 다채로운 이면을 파악하며 식탁에 담긴 현실을 ‘해체’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 식탁에 불편한 말 걸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 글은 식탁 공간에서 펼쳐지는 인간을 억압, 갈등, 침묵, 그리고 선의의 회복을 위한 논쟁의 측면에서 소설, 인문학, 영화, 그리고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식탁을 관찰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성’ 회복을 위해 뾰족한 창구는 없는지에 대한 인간적 반성을 통해 ‘식탁’에 소소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 이 글의 집필 목적이다. 식탁에서 벌어지는 세 가지 행위 식탁의 사전적 정의는 음식을 차려 놓고 둘러앉아 먹게 만든 탁자이다. 식탁이 ‘식사 행위’라는 궁극의 목적을 위해 활용되기 위해서는 음식이라는 수단이 필요하고, 아울러 ‘식사 행위’를 지속할만한 가족 구성원들만의 유려한 식사 방법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목적의 측면에서 식탁은 가족 구성원들의 식사행위를 위한 목적으로만 존속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족 구성원들이 식탁이라는 공간에 모두 함께 모이지 못한다면, ‘식사 행위’는 존재 할 수 없다. 목적의 측면에서 오늘날 식탁이 효용을 지니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바로 모든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식사 행위’를 지속할 기회와 시간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배려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식탁은 침묵해야 한다. 수단의 측면에서 식탁이 존재하기 위한 수단은 가족 구성원 들이 식사 혹은 간식 때마다 조리하여 구성원 간 ‘나눔의 행위’를 위해 활용되는 음식에 있다. 식탁이 존재감을 갖기 위해서는 식탁 위에 놓일 음식들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음식들을 조리할 역할을 맡아야 할 누군가가 필요할 것이다. 가족 구성원 중 어머니는 가사 노동의 역할을 맡아왔다. 전통적으로 그녀는 음식을 조리하여 그것을 식사 혹은 간식 때마다 대접해야 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러한 역할이 과연 어머니에게만 부여되어야 하는지의 의문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으로 인해 우리들의 어머니는 사회에서 별도의 직업을 찾아 가정 내 자신의 독립적인 역할을 추구해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할의 변화가 단순히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오늘날 어머니라는 여성에게 새롭게 부여된 역할은 자본 수익률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에 기인한다. 영화감독인 노엘 버치는 작품 <잊혀진 공간>을 통해 오늘날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이 노동 수익률보다 자본 수익률을 우선시 하게 된 변화 덕분에, 인간의 물질적 풍요는 과거에 비해 형편없이 파괴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http://www.theforgottenspace.net/static/notes.html 참조 (검색일 : 2014년 10월 30일 PM 11:30) 캘리포니아 롱비치(Long Beach)의 세계패권국 미국의 화물운송업자들은 시간 당 3.67달러를 받으며 다국적기업의 수익률을 제고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최저임금을 감수하면서 살아가야 할지, 혹은 그것에 불복하여 길거리라는 사각지대로 향해야 할지의 딜레마에 봉착한다. 노동은 현실적으로 국경과 같은 지리적 경계와 문화적 정체성의 상이함으로 인해 노동의 이동은 여전히 막혀있다. 한 대희, 경향신문,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잊혀진 공간’을 찾다』, 2011년 5월 23일자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231053552&code=900307 (검색일 : 2014년 11월 1일 AM 10:00) 다국적 기업은 더 높은 자본 수익률을 위해 더 낮은 임금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로 마음껏 이동할 수 있지만, 노동자는 그러한 자유가 제한된다. 노엘 버치(Noel Burch)는 영화 <잊혀진 공간>을 통해 오늘날의 국경 없는 바다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땀으로 얼룩진 제품을 미국 월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통로라고 비관하는 막시스트(Marxist)의 관점을 제공한다. 자본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자본의 이동은 빨라져야 하며, 노동의 가격은 현저하게 낮게 책정한 다음 자본 수익률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 최근 이러한 설명을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체계적으로 담아냈고 격렬한 주류 경제학계의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고는 하나, 만약 자본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국내 정치적 맥락이 작용하고 자본의 세계화라는 구조적 압력이 컸다면 꽤나 매혹적인 설명으로 다가온다. 노동의 가치 상승에 큰 진전이 없다면, 생계를 홀로 담당해온 남성만이 가계의 책임을 완전하게 지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머니라는 여성은 가사 노동과 직업여성으로서의 노동의 이중 부담을 감당해야 한다. Merchand, M. H., and Runyan, A. S(eds) (2000), Gender and Global Restructuring: Sightings, Sites, and Resistances (New York: Routledge). pp. 3 ~ pp. 9 이러한 현실 속에서 가족의 ‘식사 행위’를 보전을 담당하는 행위자는 모호해진다. 더 나아가, 우리 현대 사회는 어머니에게 부과되는 자식에 대한 ‘모성’과 ‘희생’이 과연 당연한 것인지 반문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한다. 린 램지 감독의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으로 점철된 어머니 상을 철저히 해체시키며, 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부과된 ‘모성’이 상수가 아니라 변수임을 지적한다. 모성을 상수로 받아들일 때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가가 이 영화의 초점이다. 즉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모성이 결핍된 여자 에바와 어머니의 애정이 결핍된 소시오패스 아들 케빈이 식탁에서 보여주는 갈등은 정상적인 모자 관계라고 규정하기 힘들다. 식탁에 앉아 에바와 케빈 그리고 아버지 프랭클린이 한데 둘러 앉아 식사하는 광경은 긴장과 공포 그 자체이다. 에바가 큰 눈동자로 케빈을 측은하게 쳐다보면, 케빈은 대추야자를 과장된 표정으로 짓이기며 응수한다. 린 램지. 2011. 「케빈에 대하여 - We Need to Talk about Kevin」 방법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의미 찾기 행위’이자 식사가 오랫동안 지속되기 위한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식탁위에 놓인 음식이라는 수단과 결합된 가족 구성원들의 대화는 소소하지만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이러한 소소한 대화가 지속되지 않는 다면, 식탁이라는 공간의 활용도는 점차 떨어지게 된다. 식탁은 다시 한 번 침묵할 수밖에 없다. 결국 식탁 존재의 의미는 가족 구성원의 ‘식사 행위’, ‘나눔의 행위’ 그리고 ‘의미 찾기 행위’ 등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됨을 알 수 있다. ‘식사 행위’의 지속을 위해서 가족은 한 자리에 모여야 한다. ‘나눔의 행위’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식사 행위의 수단인 음식 조리에 관한 역할의 책임에 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미 찾기 행위’를 위해서는 식탁에서 이뤄지는 소소하고 유쾌한 대화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 한 오늘날의 식탁의 존재는 가족 스스로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의 식탁은 우리 가족들이 이 세 요건을 충분히 충족하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가족 구성원들은 식탁에 더 이상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다. ‘나눔의 행위’는 개별 가족 구성원들은 가정식이 아닌 외식으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기에 쉽지 않고 유쾌한 대화는 사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식탁은 조용한 침묵을 오랫동안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가족의 거뭇한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식탁은 그래도 식사 행위가 간간히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가정 내 먼지가 표표히 쌓였을 다른 사물에 비해서 그나마 형편이 나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한데 모이기가 어렵다면, ‘1인용 식탁’이나 ‘2인용 식탁’과 같이 우리 가족들의 세태를 반영하는 식탁의 형태가 등장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이미 우리 주변에는 혼자 밥 먹는 방법을 배우고 그것에 익숙한 이들도 적지 않게 많아지고 있다. ‘나눔의 행위’를 개인적인 외식으로 대체하는 이들이다. 혼자 식사하는 방법과 단계는 모두 다를지언정, 저마다 혼자 식사하는 방법을 익힌 후 그 시간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김 지영, 동아일보,『혼자 밥 먹는 사람이라면 뭇 시선들과 싸워야 한다』, 2010년 4월 17일자. http://news.donga.com/3/all/20100417/27626994/1 (검색일 : 2014년 11월 2일 AM 10:00) 직업여성으로 변모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음식 조리의 역할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 없기에, 외식을 통해 음식의 ‘나눔 행위’ 욕구를 대리 충족하는 것일까? 어찌됐든 이러한 개인화된 가족의 모습은 가정의 식탁을 쓸쓸하게 한다. 순수의 강요를 위한 식탁 : 냉소로의 회귀 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변화라는 조류가 오늘날 식탁과 우리의 가족의 위상을 현격하게 추락시킨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동 가치 하락으로 인해, 우리의 가족 구성원들은 사회활동의 양을 더 증폭시킴으로써 떨어진 노동의 ‘땀’의 가치를 보상받아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가족은 무기력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들의 가족은 어머니라는 인간조차 가사를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구조적 요인에 적응해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오늘날의 가족 문제는 가족 그 자체의 내적 요인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가족 문제는 ‘가족’이 아닌 구조적 압력에 의해 파생될 가능성이 큼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가족 문제는 남성의 권력과 폭력을 어느 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고 생산 활동을 대부분 책임질 수밖에 없었던 가부장에게 부여된 권력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독일의 영화감독 미하엘 하네케는 영화「하얀 리본」을 통해 결벽에 가까운 흑백의 차가운 영상을 통해, 1910년대 가부장적 권위의 공고함이 당대 귀족, 목사, 의사 심지어 소작농 같은 하류 계층 등 모든 계급에서 발현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파급효과의 출발 지점은 바로 가정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식탁이었다. 한 대희, 경향신문, 『누구를 위하여 하얀 리본을 꽉 매고 사는가?』, 2011년 3월 22일자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221203292&code=900313 (검색일 : 2014년 11월 2일 PM 11:00) 시골의 신앙을 지배한 이중적인 목사는 자식들에게 끊임없는 순수를 강요한다. 가부장인 목사는 자식들에게 자신만의 강압적인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이 기준에 어긋난 짓을 저지른 자식들은 회초리로 훈육한다. 그리고 식탁에서 자식들의 팔에 하얀 리본을 질끈 감아준다. 하얀색이 순수를 뜻함을 넌지시 속삭인다. 목사는 질끈 감긴 하얀 리본의 압박감을 아이들의 팔에 가하며 순수를 강요했다. 자식들은 식탁에서 순수의 강요를 체험해야 했다.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아버지라는 가부장의 강압, 권위, 때로는 폭력을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어른들에 대한 강력한 일격이 시작된다. 누군가가 목사가 애지중지했던 새의 목을 가위로 자른 다음, 새의 시체를 목사의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의사는 마을 어귀에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덫에 걸려 낙마하는 사고를 당한다. 마을의 지주인 남작이 소유한 방앗간과 창고는 화재로 불탄다. 그 누군가의 악마성의 발현은 극에 달한다. 영화는 그 누군가를 시원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대신 이러한 악마적인 폭력 범인이 아이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순수를 강요받으며 하얀 리본을 질끈 매고 억압의 회초리를 감당해야 했던 아이들 말이다. 일요일 아침 예배를 보기 위해 모여든 마을 어른들을 향해 하얀 리본을 매단 아이들은 교회 2층에서 엄숙한 성가를 부른다. 아버지라는 가부장의 훈육은 시간이 흐르면 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영화는 아버지로부터 순수, 엄숙주의, 계급 갈등,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 법을 완벽하게 학습한 독일의 이 아이들이 역사적으로 누구였는지 반문한다. 그들은 다름 아닌 1930년대의 독일을 만든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자유와 거리가 먼 억압은 표출되기 마련이다. 당시 과거의 식탁은 이러한 가부장의 강요와 폭력을 재확인하는 장으로 사용된 부정적 이면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정적 이면 덕택에 식탁이 가정 내에서 중요한 공간으로 취급되었다면 과거의 가족 역시 오늘날의 가족과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가부장의 권위를 가족의 본질과 동일시하여 다른 구성원들의 존재를 격하 시키곤 했던 과거의 오류와 편향이 존재하는 까닭에, 오늘날의 무기력한 가족의 존재감이 과거에 비해 축소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옳다고 하기 어렵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가족 그 자체의 순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즉 근원적인 가족의 본성에 대한 직시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자본주의의 이면 속, 가부장의 엄숙한 권위는 노동 가치의 하락으로 말미암아 현격히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생존이 최적 선택이 되어버린 가족구성원들의 욕망이 제 각기 다르기에, 식사의 ‘나눔 행위’를 통한 ‘의미 찾기 행위’는커녕 ‘식사 행위’조차도 침묵을 유지하는 식탁 앞에서는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정 이현 작가의 소설 <너는 모른다>는 이러한 식탁 앞에서의 우리 가족들의 냉소를 잘 보여준다. 정 이현. 2009.「너는 모른다」. 서울 : 문학동네. pp. 55 ~ pp. 147 김상호의 아내 옥영은 가족의 미각에 맞춤하지 않은 요리대백과의 레시피를 그대로 옮겨놓은 무미건조한 맛으로 가족의 식사를 대접하려한다. 그녀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리 가족 구성원들의 냉소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잘 알 수 있다. 옥영과 김상호는 식탁 안에서 ‘식사 행위’는 하고 있을지언정, 그들은 식사를 통해서 어떠한 ‘의미 찾기 행위’ 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대화는 없다. 김상호가 음식의 간간함에 갈증을 호소할 때 마다 옥영은 그때마다 맞춤한 시점에 물 한잔 대접 하는 게 고작이다. 그들에게 식사란 정을 담뿍 담은 음식을 서로 공유하는 ‘나눔 행위’가 아닌 배고픔이란 일차원적 욕구를 달래기 위한 식욕을 채우기 위할 시간일 뿐이다. 가족들의 식사가 끝난 후, 이 말없는 가족들의 일요일 오후는 저마다 개인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시간으로 순식간에 변모하고 만다. 옥영은 대만에 있는 친정을 방문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를 만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상호는 사업상의 이유로 골프장으로 향한다. 상호의 전처의 자식인 혜성은 데이트가 있어 떠난다. 은성은 이미 오래된 연인과의 나른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집안에 남아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이올린 과외를 하루 종일 받아야 하는 음악 영재인 열 한 살의 유지뿐이다. 혈연으로 얽혀 있고 가족이라는 한 울타리에 속해있지만 ‘타인’, 그리고 파편화된 ‘단독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과거의 식탁 주변에서 일어났던 가족 구성원 간의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여전히 냉소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었다. 가부장이 생산해낸 가정의 폭력과 달리, 이러한 무관심과 냉소는 새로운 차원의 가정 폭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거 가족 내에서 일어났던 순수의 강요라는 억압과 오늘날의 냉소가 근원적으로 가족 구성원 내부에서 파생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다만 가족 내에서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합의해온 이러한 폭력들은 당대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정 깊숙이 젖어든 것은 아닐까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가정의 순 기능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구조적 강압이 가족 내부로 투영된 파급효과가 강하여 가족이 갖고 있는 순 기능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발현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는 가족문제가 과연 오늘날만의 문제인가? 이는 1910년 이라는 백 년 전의 과거의 문제도 아닐 것이며, 2014년인 오늘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 즉 가족문제에 얽혀있는 대부분의 폭력은 당대 사회의 어두운 이면의 잔영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가족 구성원은 이 이면의 잔영으로 신음하는 희생자로 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의 가족 문제는 가족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노력만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가정의 위기와 식탁 활용의 빈도에 관한 관찰 사회 구조적으로 파생된 냉소라는 무언의 폭력이 식탁 주변을 맴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의 가족과 식탁에는 희망을 걸어볼 근거가 분명 있다. 즉 가족 구성원의 존재의 위기가 봉착해야만 가족의 본성을 바로 직시하게 되는 특이한 모순이 포착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가족 위기의 파급이 커지면 커질수록 오히려 가족의 순 기능이 발현되는 바로 그 지점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식탁 활용의 빈도는 높아진다. TV를 통해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에서 보여준 한 가족에 대한 시선은 이러한 역설이 현실에서 포착할 수 있음을 입증한다. 김 인수 ․ 노 경희. 2011.『엄마라는 이름』 http://www.imbc.com/broad/tv/culture/spdocu/love/love_2011/1795649_39900.html 참조. (검색일 : 2014년 11월 3일 PM 20:00) 스물넷의 나이로 만성골수백혈병 진단을 받은 석 지은 씨의 가족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소원했던 가족 관계가 석 지은 씨의 발병을 통해 더욱 긴밀하고 조밀하게 연결되어 가족의 순 기능을 회복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석 지은 씨 개인 스스로도 ‘엄마’라는 당당한 이름을 얻기 위해 또 다른 가족을 잉태하고자 하는 개인적으로 처절한 노력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석 지은 씨가 제공한 가족 구성원의 존재의 위기 덕분에 지은 씨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일 지은 씨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은 씨의 어머니는 블랙계열의 둥근 식탁을 꽉 채운 반찬과 따뜻한 밥으로 딸을 대접한다. 그리고 글리벡이라는 표적 항암제라는 신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병이 낫을 수 없고, 신약을 복용하면 지은 씨의 자식이 기형아가 될 확률이 높아지게 되는 딜레마로 인해 딸에게 눈물을 보이고 만다. 이렇듯 ‘가정의 위기’는 가족의 구성원들 개개인의 희망에 경청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그들의 식사 공간인 식탁은 가족의 구성원들이 더 조밀해질 수 있는 장으로 변모한다. 이는 비단 석 지은 씨 가족만의 문제는 아니다. <너는 모른다>의 김상호 씨의 가족은 집안에 홀로 남은 자식 ‘유지’가 실종된 이후에서야 비로소 서로 말 못할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식구들은 더 결속된다. 생명가치를 담보로 가족의 위기가 봉착하기 전, 우리들의 가족은 의무적으로 묶여 한 가정이라는 공간 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가족 구성원들이 무엇을 하는지 기실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타인보다도 못한 소통 부재의 불편함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 존재의 위기가 발현 되어야만 가족의 선의가 회복되는 아이러니를 통하여, 가족의 순 기능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관찰하게 되어 다행스럽긴 하다. 그러나 ‘가정의 위기’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오늘날 가정은 고요하며 식탁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식탁의 침묵을 일깨우고 ‘나눔 행위’와 ‘의미 찾기 행위’를 위한 진정한 공간적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식탁은 가정에서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할까? 식탁하다(Tablize)?!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의 견해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엘리너 오스트롬. 2010. 「공유의 비극을 넘어 - Governing the Commons」. 서울 : 랜덤하우스. pp. 70 ~ pp. 84. 엘리너 오스트롬은 공유지나 공유자원의 집합적인 관리를 위해서 시장이나 정부가 아닌 공유지와 공유자원에 관련된 사용자나 이해관계자의 역량과 의지를 통한 직접 관리의 필요성을 주장한바 있다. 상세한 조업 규칙을 만들어 어장을 관리하는 터키의 어촌, 방목장을 함께 쓰는 스위스 목장 지대, 농사용 관개시설을 공유하는 스페인의 마을 등이 그 사례 들 중 일부이다. 오스트롬은 사용자간 정교한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작동시키면 공유 자원이 효과적으로 관리된다고 보았다. 물론 그녀의 논의는 어촌, 마을, 목장지대와 같이 거대한 사회공동체가 아닌 소규모의 사회 공동체에서 유용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로 작용한다. 소규모 사회 공동체에서는 정교한 제도적 장치의 파급효과는 의외로 공동체를 결속함에 있어 강력할 수 있다. 인원이 얼마 되지 않는 사회 공동체에서 제도적 장치를 위반한 자는 개인의 명성에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게 된다. 이 경우 공동체 내 공유자원의 사용권에서 점점 배제될 수 있기에, 공유자원을 더 적합하게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이를 가정에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 사실 식탁이라는 공간을 가정의 공유자원이라기 보다는 공공재에 가깝다. 오늘날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식탁을 차지하려 다투지도 않고, 식탁 사용을 배제하려 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스트롬은 공유 자원의 경우 사용을 배제하지는 않더라도 사용자 간 다툼이 있어야 함을 지적한바 있다. 서늘한 침묵이 감도는 식탁은 애초에 사용의 배제가 일어날 수는 없는 가정의 자원이라 할 때, 가족의 구성원들이 식탁 공간을 차지하여 ‘의미 찾기’와 ‘나눔의 행위’를 상호작용하는 공유 자원으로 귀착시켜보자는 것이다. 가족 구성원들을 주말 저녁과 같은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탁에 모이도록 사적인 암묵적 합의를 만들고 이를 강제할 규칙을 존속하게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식사 행위’, ‘나눔의 행위’, 그리고 ‘의미 찾기 행위’ 중 ‘식사 행위’의 빈도만이라도 높일 수 있도록 가족 구성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야 하는 것이다. ‘나눔의 행위’와 ‘의미 찾기 행위’는 그 다음이다. 이러한 고민 속에는 의외로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한 적이 언제인지도 흐릿한 개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현실에 기반 한다. 식탁으로 가족 구성원들을 모이게 하는 것 정도가 가족 구성원들이 내부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해결책 일 수밖에 없는 속사정은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오늘날의 자본의 세계화와 경쟁 사회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피상적으로 흡수되어갈 수밖에 없는 세상의 배려 없이는 가족들의 ‘식사의 즐거움’은 회복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 구성원들의 본성이 사회 구조의 잔영 속 묻혀 있는 선의가 내재되고 있음을 확인한 이상 이를 강제적으로라도 발현할 규율이라도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음식을 차려놓고 인간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구성하는 가정의 식탁(Table)은 해체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맥락 하에서는, 이러한 해체가 과연 부정적인 것이라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즉, 가정에 자리한 식탁의 서늘한 침묵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 때, ‘나눔의 행위’와 ‘의미 찾기 행위’를 가정이 아닌 사회 내 자리 잡은 수많은 식탁 위에서 타인들과 나누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면, 그 사회는 나름대로 건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이러한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사회 구조적 압력은 거세지만, 식탁이 어디 놓여있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음식을 차려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시도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장 대익의 <다윈의 식탁>은 진화론에 대한 도킨스와 굴드의 논쟁을 촉발하고 있는데, 이러한 선명하게 다른 두 관점을 크게 7가지의 이슈로 나눠 ‘식탁하다’라는 신조어를 붙여 진화론에 대한 논쟁을 가상의 식탁 위에서 펼쳐 보인다. 자연선택, 협동, 유전자의 환경, 진화의 속도, 진화와 진보, 진화론의 계보, 그리고 진화론과 종교의 이슈를 토론 메뉴로 지정하여 도킨스와 굴드를 가상의 식탁으로 초대해 첨예한 과학철학의 논쟁을 선보인다. 장 대익. 2014. 「다윈의 식탁」. 서울 : 바다출판사 pp. 268 ~ pp. 270. 비록 가상의 식탁에서 두 학자 진영의 수많은 학자 간 토론이 이 책에 담겨있지만 만약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즉, 가정이 감당해야 할 식탁의 사회화가 가정의 바깥에 사회 곳곳에 자리한 다양한 식탁에서 누군가와 자신의 아이디어와 포부를 타인과 끊임없이 말 걸기를 시도한다면, 가정 식탁의 해체와 그 기능의 대체는 발전적이고 건설적 해체이다. 가령, 우리나라에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는 ‘커피 문화’ 역시 탁자에 앉아 인간의 말 걸기의 욕망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인식의 지평을 시각적 차원을 넘어선다면, 보다 추상적인 식탁 역시 현실 속 존재한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 자신 주장의 개요를 소개하는 목차 역시 영어로 ‘Table’ of Contents이다. 즉, 목차 역시 자신의 아이디어를 타인에 대해 소개하는 말 걸기의 일환으로 하나의 ‘식탁’인 셈이다. 자신이 하루의 삶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세우며 작성해 보는 시간표 역시 영어로 Time ‘Table’이다. 이렇듯 식탁은 단순히 공간적, 시각적 의미를 뛰어 넘어 나와 너의 아이디어를 상호작용하기 위한 추상적 의미를 갖기도 한다. 장 대익은 이러한 상호작용을 ‘식탁하다-Tablize’라는 동사를 새로이 만들며 지칭하며 인간의 진정한 진화는 ‘논쟁’과 ‘대화’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그 수단은 ‘식탁’에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가정의 식탁이 사회 구성 적 맥락의 식탁으로 그 의미가 때로는 공간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추상적으로 구성되고 해체 될 수 있을 때, 인간성의 회복은 가능하다. 맺으면서 : 다양한 식탁으로의 해체 앞선 논의를 요약해보자면, 식탁의 쓰임새가 인간에게 어떻게 유의미하게 될 수 있는지에 관한 ‘세 가지 행위’ 및 각각의 행위가 작동하기 위한 조건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행위를 기반으로 하여, 식탁 주변에서 일어난 가족의 존재에 관한 과거 및 현재의 이면을 살펴보고자 했다. 이러한 이면 속에 등장한 가족 간의 냉소와 폭력은 결코 가족 그 자체에서 파생된 내부적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임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가정이 모종의 위기에 봉착해야만 식탁의 본연의 가치가 발휘되는 아이러니를 살펴보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정치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의 이론적 논의와 장 대익이 고안한 ‘식탁하다-Tablize’라는 신조어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가정의 식탁에 대한 ‘새로운 해체’를 제안한다. 가정의 식탁이 해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식탁과 같이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그 자체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 성란의 작품인 「식사의 즐거움」에서 언급하듯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아들은 포마이카 밥상이 엎어져 흠집이 잡히는 광경을 수도 없이 목도한다. 순식간에 밥상이 엎어진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밥그릇과 국그릇, 접시 들이 방바닥으로 하나, 둘 떨어지면서 김칫국물이 방 사방 곳곳으로 튄다. 육각형의 밥상이 데굴데굴 장롱 쪽으로 굴러간다. 방 안은 금방 온갖 음식물이 뒤섞여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아버지가 밥그릇을 발로 걷어찬다. 남자는 아버지를 벽 쪽으로 밀어 자신의 두 팔 안에 아버지를 가두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남자는 아버지를 피해 문가로 달아나면서 이틀을 소리 나게 부딪친다. 아버지가 남자의 머리통을 손바닥으로 후려치고 마루로 나간다. 어머니는 밥상을 들고 와 방안에 흩어진 것들을 두 손으로 쓸어 담는다. 어머니는 음식물 범벅이 된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친다. 이미 여러 군데 귀가 떨어진 흠집투성이인 포마이카 밥상에 또 다른 흠집이 생긴다. 남자는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밥상을 노려본다. 이 밥상이 반으로 부서지기 전에 나는 이 집을 나갈 것이다. 하 성란. 2010.「식사의 즐거움」. 서울 : 현대문학. pp. 50 ~ pp. 51. 그러나 정작 주인공인 아들이 아버지가 죽자 가족들이 다함께 할 새로운 포마이카 밥상을 새로 살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공간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가정이든 사회에든 우리 눈과 마음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식탁들이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데 새롭게 진화함을 염원하는 희망을 식탁 위에 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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