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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 존재의 무게
2014년 04월 30일 (수) 22:15:14 최재련 jryeonee@gmail.com
●미생: 아직 살아있지 않은 상태 바둑에서 집(그림에서 8개의 검은 돌이 둘러싼 지점)이 두 개 이상 있어야 ‘살아있다’(生)라고 합니다. 두 개 이상의 집을 갖기 위해, 평생을 힘겹게 살아가지만 두 집 내고 안정을 꾀하기란 만만치 않습니다. 겨우겨우 돌 하나 더 잇는 삶이 어느덧 뒤돌아보면 대마가 되어 포기도 쉽지 않게 되지요. 겨우 두 집이라도 내기 위해서, 살아있기 위해서, 자신의 한 판 바둑(삶)을 승리하기 위해서 터벅터벅 한 수, 한 수 돌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 들어가며 “너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해. 아니면 너 죽도 밥도 안 돼!” 나를 걱정하는 친구의 한 마디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다. 5학기가 되니 내 대학 생활의 50%가 지나갔다는 생각에 불안했던 이유도 있다. 교지의 수습위원으로 들어와서 회의도 해보고 나름 글도 써봤다. 수업도 열심히 들으려고, 시험 준비도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도 방학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틈틈이 계획도 짰다. 내 평생의 숙원 사업이었던 치아교정도 내가 직접 모은 돈으로 시작했다. 새 학기 못지않게 새로운 것이 많은 몇 달이었다. 그러다가 퍼뜩 ‘내가 뭐하려고 이렇게 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뭐 때문에? 그러다 tvN에서 새로 시작한다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내가 참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단행본까지 가지고 있는 <미생>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였다. 복사도 제대로 못 해서 쩔쩔매는 장그래를 보며 나는 사무보조로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임시완(장그래 役)은 사무실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아마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다시 확인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며 나의 고3 시절을, 그리고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그때의 나보다 더 초라하게 느껴지는 나의 현재를 떠올렸다. 잡일도 제대로 못하는 장그래의 모습 자체가 나에게는 위로였다. 글쎄, 그 이유는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이 발전의 시작이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추측해본다. (물론 임시완의 얼굴 자체가 위로가 된다) 이 글에서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에서 장그래가 말하는 ‘미생’의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왜 내가 혹은 당신이 자신을 미생이라 생각하는지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를 지배해왔던 ‘내 존재에 대한 의문’과 맞닿아 있는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글이 나에게도, 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 존재의 무게 애초에 전문계가 아닌 인문계를 선택했으니까 내가 공부를 하지 않으면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돈이 없는 것보다는 돈이 있는 것이,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병행하는 것보다는 공부에만 전념하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되는 줄은 나도 안다. 부잣집이 아니라 넉넉하게 모든 것을 다 사고 다 하고 살지는 않았으나 부족함 없이 키워주려 애 쓰신 부모님의 노고를 알기에 아무 불평도 하고 싶지 않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나는 공부에 재능이 없다’는 말로 현 상황을 변명하는 것은 가슴 속에 남아있는 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나는 재주가 없다는 말로 자신을 포장하지 않을 것이다. 공부를 잘하려 노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다. 넉넉해야 공부를 잘하기 쉬운 세상인 줄도 알고 그 세상에서 내가 결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세상도 내가 이미 깊숙하게 발을 담근 곳이다. 세상을 바꿀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이것저것 불평하는 것은 핑계다. 내 선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에서 이 답답한 상황의 문제를 찾는 것이 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엔 남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이제 열심히 하기만 하면 나의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야만 한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나의 문제이다. 나만 달라지면 된다.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어릴 때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목표로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입단에 계속 실패하자 지인의 청탁으로 종합 상사인 원 인터내셔널의 인턴으로 들어가게 된다. 면접을 거쳐 ‘원 인터내셔널’에 들어온 다른 인턴 동기들은 낙하산이라는 이유로 그를 탐탁찮게 바라본다. 인턴들 입장에서는 전혀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외부인이 자기들의 영역을 침입한 것과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장그래’의 인생에서도 상사맨, 회사원은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이질적인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다. 몸담고 있던 바둑세계에서 실패만을 맛본 ‘장그래’는 자신이 내던져진 ‘원 인터내셔널’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한다. 과거에 자신이 졌던 바둑경기에서의 오판과 실수를 회사에서는 저지르지 않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바둑을 명사. 바둑에서,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 봄. 복기한다. 그에게 회사 생활은 하나의 바둑 경기와 같다. 그는 입사 전까지 평생 바둑만을 해온 사람이다. 학교, 학원, 취업준비, 직장생활 이 일련의 과정을 업으로 생각해온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나친 감정이입 없이 세계의 모든 면들을 바둑으로 해석하는 전지적 시점의 서술자처럼 ‘상사맨’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요새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너무 힘들어ㅜㅜ. 나는 놀지도 않고 바쁜데… 나 빼고는 왜 이렇게 잘 사는 거 같지? 엉엉(슬픔)’이라고 카카오톡으로나 날릴법한 내 요즘 현실을 그는 ‘미생’이라 압축한다. 미생이란 아직 살아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완전히 살아날 가능성을 갖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팍팍한 현실을 살아나지 않은 상태라 한다는 점에서 아주 냉정한 정의이고 동시에 살아날 가능성을 갖춘 존재라고 나를 위로해주는 말이다. 웹툰 <미생>을 원작으로 한 TVN의 동명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고 있다. 크게 연기력이 달리는 연기자가 없다는 것과 그들이 현실의 회사를 너무나도 잘 구현하고 있다는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내가 그 인기요인을 추가하자면, 나의 어깨에 무겁게 자리 잡은 짐짝 같은, 하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나의 ‘존재’를 ‘미생’이라 압축하여 전달한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며 북돋아 주셨다.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나는 가능성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는 날고 기는 알파 시그마들과 누구네 딸, 아들에 눌려 ‘나는 왜 사나’, 그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존재이기도 하다. 남들은 다 뭐든 하고 바빠 보이는데 어쩜 내가 한 것은 그리 부족해 보이는지, 방학 때 아무것도 안하고 일주일이라도 놀라치면 어딘가 찜찜한 그 느낌을 해소할 수 있는 답을 찾고 싶을 때도 있다. 내가 꿈꿔온 나의 모습과 나의 현실 그 두 개의 간극이 너무나 멀고 공허하기 때문에. 불안은 아무것도 없다는 데서 생긴다. 알려진 정보도 없고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죽음을 떠올리면 불안하다. 해놓은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다는 ‘공허함, 아무 것도 없음’에서 나는 불안을 느낀다. 지원한 회사 10군데에서 8곳은 서류 탈락, 2곳은 최종면접에서 탈락일 때, 불안하다. 마지막 학기가 가까워져 올수록, 자소서의 공란이 많을수록 불안하다. 떨린다. 이렇게 나의 대학생활이 끝나 버릴까봐, 이 상태로 마지막 학기가 지나면 가능성이 끝나 버릴까봐 두렵다. 정신없이 살다가도 고개를 들면 머릿속에 질문 하나가 스친다. 이거 취업하면 끝나려나? 아니, 아닐 거다. 어떤 방식으로든 불안은 계속 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다시 고개를 숙여 책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무거운 나의 존재를 버릴 수 없다. 나는 생을 제대로 살아내고자 하는, 완생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싶은 ‘미생’이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 역시 ‘미생’이다. ● ‘살아있음’의 상태 누군가를 未(아닐 미)生이라 가리키는 것은 生의 상태에 대한 합의를 필요로 한다. 나의 왼쪽 가슴 아래에서 심장이 뛰고 내 숨이 지금 끊어지지 않았다는 생물학적 삶의 상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보다는 나의 삶을 어떤 것으로 채우는지가 관건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개개인의 생각이 모두 다르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가능성, 능력, 기질을 세상에게 펼쳐 보이고자 노력한다. 나의 삶이 내가 원하는 가치들을 향하는지, 내가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채워졌는지, 나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현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한다. 우리가 자신을 미생이라 말하는 것은 삶에 대한 이런 고민들과 닿아있다. 우리는 남을 보며 삶의 동기 부여를 받는 경우가 많다. ‘아, 저 사람 정말 삶을 제대로 살아내는구나.’ ‘저게 삶이지.’ ‘닮고 싶다.’ ‘질투난다.’ 이런 생각들을 따라가면 나의 롤모델, 나를 자극하고 동기를 부여해주는 사람이 진정 살아있다고 생각함을 알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한 사람, 그 사람이 해낸 것이 한라산 등반이든, 세계 일주든 아니면 원하는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든 뭐든 간에 말이다. 드라마 <미생>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첫 날 출근한 ‘장그래’는 복사기도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 상사에게 구박을 받고 비품실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A4용지 하나를 찾는 것도 서툴다. 외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도 대답할 방법을 몰라 허둥지둥 댄다. 복사와 전화 받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업무도 제대로 못해서 이리 저리 치이는 ‘장그래’에게 공감하는 시청자가 많았다. 시청자들 역시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처음 출근한 가게에서 '왜 나는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지?' 자책하고 별 거 아닌 걸로 지적받아서 울고 스트레스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거다. 그 다음 장면에서 ‘장그래’는 고개를 들어 사무실 전체를 둘러본다. 사무실 안의 직원들은 영어, 러시아어, 일본어, 불어 등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업무를 본다. 무언가 회사를 발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그래’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데 회사 사람들은 업무 시간 전체가 할 일로 들어차 있는 것만 같다. 회사는 그들을 필요로 하고, 나를 필요로 하진 않는다. 졸업 후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 미리 입사한 선배를 보면, 진학하고 싶었던 대학교, 혹은 로스쿨 혹은 특정 학과에 다니는 사람을 보면, 20대의 특권이라 하는 배낭여행을 떠나 유럽 곳곳을 누비는 친구를 보면 구체적 현실과 닿은 내 삶은 초라해 보이고 나의 이상과 맞닿은 그 사람의 삶이 정말 뭔가 이루어낸 삶처럼 느껴진다. 그는 나보다 나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고 내가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삶의 양태 [명사] 1.사물이 존재하는 모양이나 형편. 양태를 온 몸으로 보여준다. 내가 욕망했던 혹은 욕망하는 것을 이미 성취한 사람을 보며 우리는 초라해지기도 하고 저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동기를 부여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본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은 사람을 보며 나는 아직 가능성이 완전히 발현되지 않은 미생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객관적인 기준이 아닌, 나의 욕망이 무엇이냐에 따라 ‘완생’과 ‘미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욕망하는 자만이 ‘나는 미생이다.’라는 자각을 할 수 있다. 나는 무언가 더 해보려하기에. 나의 가능성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원래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 어릴 적 내 삶의 중심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돌잡이 때 아이가 연필을 잡느냐, 판사봉을 잡느냐 그 손짓 하나가 엄마 아빠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생활은 아이의 욕구 충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았다고 떼를 쓰며 울 수 없다. 어린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은 언제나 바로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와 어른의 차이점은 그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모두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나 어른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삶이 부조리한 것은 나 말고도 세상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왕자도 공주도 아닌 나의 삶이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도 없고 나의 의견이 언제나 존중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아이 때에는 알지 못했던 자명하고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살면서 부딪치고 깨지며 알아간다. 타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나는 그저 수많은 개인들 중 하나일 뿐이다. 나의 욕망이 특별한 것인 양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세상에 나의 욕망뿐만 아니라 나를 제외한 타자들의 욕망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개인은 타자들의 욕망을 절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그것은 타자들 사이에 있는 수많은 관계 때문이고 나의 탄생 이전부터 타자들이 만들어왔던 도덕, 법, 미美, 기준 안에서 우리가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에서 나의 존재를 바라보고 나의 욕망을 재단해야만 나는 사회 안의 어른이 되어간다. 타자의 욕망을 내재화하고 나 자신을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듯, 남이 나를 바라보듯’ 응시해야 사회화가 된다. 어릴 때처럼 내키는 대로 기저귀에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의 눈치를 보며 화장실에 간다. 내가 놀고 싶어도 공부를 하면 엄마가 기뻐하니까, 예의바르게 행동하면 어른들이 좋아하니까 자신의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고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한다. 이런 학습이 어렸을 때부터 버릇처럼 나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와 욕망에 의해 자신의 욕망이 꺾이는 것을 경험하며 우리는 성숙한다. 어떤 누구의 꿈도, 장래희망도, 가치도 완전히 그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없다. 타자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 한 결과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 ● 실패를 받아들이는 미생의 자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고3 입시 실패 후 손목에 칼을 대 본 사람이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 사람은 담담했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 그 사람이 대답했다. ‘평생 공부와는 무관한 직업을 가질 것 같아서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뭐라도 직업 같은 직업을 가지려면 공부를 해야 하더라. 나는 잘 놀고 열심히 노는 게 내 지나가는 삶에 대한 예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사람같이 살려면 싫어도 공부를 해야 했는데, 나는 사람으로서 내 삶에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그게 너무 부끄럽고 가슴 아픈데 손목 조금 찌르는 것이 그것보다야 얼마나 아플지 궁금해서 한 번 찔러봤다.’ 이 시대의 수많은 ‘청춘’들은 기성세대가 이미 만들어놓은 가치 속에서 삶을 살아왔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관습적인 가치들은 머리끝까지 기어 올라와 나의 가치판단을 뒤집어엎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사사건건 간섭한다. 무엇을 할 때마다 “이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앞선다. 타자의 욕망이 만들어 놓은 가치체계는 나의 탄생과 욕망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것이 너무나 공고하게 존속되었기 때문에, 세상 대 나의 대결이라면 속된 말로 ‘쪽수로도’ 힘이 달리기 때문에 그것을 뒤엎기가 어렵다. ‘잘 놀고 열심히 노는 것’이 자신이 삶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 사람은, 이윽고 그렇게 살다가는 이 사회 안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날 ‘가능성을 내포한’, ‘완생’으로의 가능성을 가진 미생이 아니라 내내 그저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머물기만 할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불안감에 공부했을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었다기보다는 사회 안에 편입하기 위해, 무엇도 아닌 상태에서 미생으로, 미생에서 완전한 생의 상태로 전진하기 위해 그렇게 공부했을 것이다. 사회가 ‘이렇게 사는 것은 잘못 사는 것’이라고 규정해놓은 실패를 경험하면 우리는 불안에 괴로워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를 내재화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노력하느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외롭기 때문이고 더 험난하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사회 안에서 나의 의미를 찾는 것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사회적 가치를 내재하지 않으면 생의 단계에 올라설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 태양의 의미 까뮈의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연락을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의 장례식 날에도 뫼르소는 보통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하지 않는다. 대신에 담배와 해수욕, 여자에 관심을 쏟는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충동과 욕구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에게 도덕, 상식, 의무와 같은 추상적인 관념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옆집 사람 레옹에게 옛 여인에 대한 복수를 부탁 받는다. 부탁에 응한 뫼르소는 여인에게 복수하겠다는 레옹의 계획을 반쯤 성공시키지만, 여인의 아랍인 친척들이 곧 레옹과 뫼르소를 뒤쫓는다.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그들의 싸움이 벌어진다. 싸움이 일단락되자 뫼르소는 혼자 해변으로 나간다. 그 곳에서 아랍인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거기에서 그는 총으로 아랍인을 쏜다. 그렇게 살인을 저지르고 법정에 선 뫼르소에게 ‘왜 사람을 죽였느냐’고 묻자 그는 ‘뜨거운 태양 때문에’라고 대답한다. 주인공의 이름 뫼르소: Meursault는 죽음:meura와 태양:sault이 합쳐진 것이다. 태양과 죽음, 그것은 곧 태양을 부정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아랍인과의 싸움이 끝나자 해변으로 갔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해변의 그늘로 가던 뫼르소는 아랍인과 다시 만난다. 아랍인은 그 때 칼을 꺼내들고 뫼르소를 위협한다. 그 때 태양의 빛은 칼에 반사되어 뫼르소의 눈을 비춘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뫼르소를 공격했던 것이다. 그에게 태양은 휴식을 막고 휴식할 그의 자유를 막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었다. 뫼르소는 자신을 너무나도 숨막히게 하는 어떤 것을 총으로 쏘았고 그 때문에 아랍인이 살해당했다. 근본적으로 태양을 제거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나 그것이 나의 완전한 자유를 억압하고 나의 휴식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태양은 타자의 욕망과 닮아있다. 내가 따라야만 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준들, 가치들이 곧 태양이 상징하는 바이다. 소설 <이방인>은 절대 선(善)이라고 생각되는 태양을 무의미하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점을 여러 장면에서 설명한다. 인생의 전부처럼 생각되는 태양을 쏘아버리라고 한다. 뫼르소는 결국 법정에 서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내게 뫼르소처럼 태양을 쏘고 법정에 설 용기가 있는가, 나의 목숨까지 잃을 용기가 있는가, 뫼르소에게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기투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것에 관해서’ 생각한다. ‘오늘 아침에 내가 뭘 먹었지? 어제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가 뭐였더라? 아 커피마시고 싶다.’ 등등, 자잘한 나의 모든 생각은 언제나 그 대상이 있다. 심지어는 ‘나는 생각하고 있다.’까지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다. 이렇게 우리 의식은 의식 그 자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나 외부의 대상을 향해있다. 우리 의식 자체만 놓고 보면 텅 비어있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유명한 명제는 바로 이런 의미이다. 텅 비어있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 정해져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나는 텅 빈 존재이다. 텅 비어있지만 ‘존재’이다. 실존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 있다. 누군가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을 가져야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고 이성을 버린 인간은 그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게 된다. 어떤 것이 인간의 본질로 규정된 순간, 인간은 그것을 법처럼 따라야만 한다. 본질이 없다는 것은 따라야 할 가치도, 준수해야할 법규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다. 나 자신을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나에게 본질이 있고 내가 따라야 할 규범이 있다면 그것에 충실해서 삶을 살면 된다. ‘인간의 생명은 무엇보다 존엄하기 때문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나는 살인하지 않고 모든 인간의 생명을 소중하게 다루며 살면 된다. 그러나 그러한 계명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것도 ‘당연히 이게 답이지’라고 선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매 순간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가 나에게 마치 숙제처럼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재가 짐처럼 주어진다. 내가 존재하는 이상, 나의 실존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내가 선택해야만 한다. 무엇이 나의 삶을 채울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이기에, 나는 현실세계에서 가능성을 전개한다. 나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삶에서 나의 의미를 창조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마지막에 나에게 드러난다. 본질도 규범도 내가 만들어간다. 그 자유가 나의 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얹어진 것이다. ●완생은 없다 만화 <미생>은 정말 현실적이다. 나는 종합 상사에 다니는 회사원이 아님에도 자꾸만 나의 모습을 책에서 발견하고 "와, 사람 사는 거 진짜 똑같구나."하며 그 내용에 더 빠져들게 된다. <미생> 그린 윤태호 작가가 나를 보면 뿌듯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얼마 전 열린 그의 토크 콘서트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는 내용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목격하는 것을 도울 수 있도록 충실하게 현실을 만화에서 생중계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그의 의도가 충분히 먹혀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학생이 된 후, 내가 고3 시절보다 더 힘들었던 이유는 내게 주어진 자유가 더 많기 때문이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려면 수능을 잘 치면 됐다. 그것은 모두가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사실이었고 나는 수능과 대학만을 위해서 살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 누구도 수능처럼 간단하고 준비하기 쉬운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좋은 회사의 @@부서에 들어가려면 언어 100점 만점을 맞아야 하고 사회탐구에서 정치, 경제, 윤리를 선택해서 두 과목 이상 만점을 맞으면 된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때 교실 벽에 붙어있던 대학 배치표처럼 회사 배치표도 대학교에 붙어있으면 좋겠고 현재 내가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 중 몇 등인지 전국 모의고사도 쳤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없다. 어느 시험을 준비하든, 어느 회사의 어느 부서를 지망하든, 그를 위해 어떤 스펙을 마련하든 혹은 전혀 다른 삶을 택하든, 그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선택은 자유다. 자유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직접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내가 짊어진 과제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자유롭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욕심이 많아서 혹은 어떻게 하면 잘 사는 건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얼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윤태호 작가는 그의 토크콘서트에서 "완생은 없다."고 말했다. "잘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하지만, 잘 살기가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욕심을 버리고 살기는 너무나 힘든 삶이라 우리에게 완생은 없다. 완생은 손에 잡히지 않는 지향과 같은 것. 사람이 산다는 것은 미생이다." 욕망하는 자만이 완생을 꿈꾼다. 당신의 모든 욕망이 이뤄진 완생의 상태, 그 이상을 설정할 수 있기에 당신은 미생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욕망 가운데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욕망을 포기해나가는 것도,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도 녹록치 않다. 완생은 없다. ● 그래도 바둑이니까 천사가 내려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당신의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천사의 말을 따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천사와의 만남 자체를 꿈이라 생각하고 현실에 충실히 살아갈 것인가? 아브라함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유에 달린 일이다. 선택에 뒤따르는 결과도 모두 아브라함이 수긍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천사의 말에 대해 결정을 내린다 한들, 아브라함의 삶이다. 그가 어떻게 하든 타인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삶일 뿐이다. 고뇌에 가득 찬 아브라함을 누가 본다한들 세상 일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는 것이 뭐라고 이렇게 머리 아프게 고민을 하십니까? 그냥 살면 되지. 미생이고 미생이 아니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미생이고 완생이고 그것들이 있긴 한 건가요? 아니, 댁 말씀대로 완생이 없다면 왜 산답니까?”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는 조치훈 九단의 말을 빌려 대답하고 싶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태어나고 지는 것이 세상에 별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 내 목숨이고 그래봤자 ‘나’ 한 명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 목숨이다. 내 삶이다. 내 전부인 이 삶은, 나에게 주어진 모든 세상이다. 고민 끝에는 나에게 어떤 표지가 주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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