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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나이트> ; 그래도 삶은 흘러간다
2014년 04월 30일 (수) 22:13:58 박성준 편집위원 skalu666@naver.com
<부기 나이트> ; 그래도 삶은 흘러간다. 박성준 편집위원 (skalu666@naver.com) 누구인가? 폴 토마스 앤더슨 폴 토마스 앤더슨. 29세에 찍은 세 번째 장편 영화 <매그놀리아>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32세에 <펀치 드렁크 러브>로 칸 영화제 감독상. 42세에 <더 마스터>로 베니스 은사자상 수상. 고작 6편의 영화로 ‘세계 3대 영화제’의 상이란 상은 전부 받은 천재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앞에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고, 대다수는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화려한 수상 경력이 폴 토마스 앤더슨을 다짜고짜 추천하는 이유의 전부일까? 아니면 마틴 스콜세지와 로버트 알트만을 이어받은 현란한 카메라 워크 때문일까? 5명이 넘어가는 등장인물들을 한 숏에 모두 보여주는 그의 능력은 입을 떡 벌어지게 하지만, 이것이 그를 추천하는 이유는 아니다. 그렇다면 폴 토마스 앤더슨을 추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영화들에서 우리와 닮은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앤더슨의 영화에는 2가지 모티브가 조금씩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하나는 흔들리며 방황하는 인물들이다. 다른 하나는 방황하는 인물들이 모여서 만드는 ‘유사 가족’ 관계이다. ‘어? 이게 왜 우리의 모습이지?’라는 의문이 드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제부터 폴 토마스 앤더슨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찍은 첫 번째 영화인 <부기 나이트>를 통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부기 나이트>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최고작은 아니다. (보통 평론가들은 <매그놀리아> 혹은 <데어 윌 비 블러드>를 최고작으로 뽑는다.) 하지만 <부기 나이트>는 앤더슨이 앞으로 보여줄 모티브들을 복잡하지 않게,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쉽게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덤으로 영화 자체의 완성도도 뛰어나다! 경쾌한 디스코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와 있다. 1. 흔들리며, 방황하는 영화 <부기 나이트>는 1970년대 말, 히피와 베트남전 반대 시위의 열기가 사그라진 시대의 거리와 경쾌한 디스코 음악과 함께 시작한다. 카메라는 주로 에디의 모습을 뒤쫓는다. 에디는 지방에서 올라와 디스코 클럽에서 일하는 별 볼 일 없는 청년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루저’. 다만 그는 한 가지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13인치(=33cm)에 달하는 거시기. 그 거시기 덕분에 막연히 스타로 성공하고 싶었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자칭 ‘영화감독’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잭 호너에게 발탁된 것이다. 에디는 ‘덕 디글러’라는 가명으로 포르노를 찍어,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된다. 떼돈을 번 잭 호너의 집은 포르노 스타들과 그들 주변에서 떡고물(?)을 얻기 위한 부나방들로 시끌벅적하다. 마약과 술, 돈과 섹스가 넘쳐 흐르는 그의 집은 성공의 들뜬 분위기가 맥주 거품처럼 넘쳐 흐른다. 하지만 이따금씩 권태로운, 심지어 허무한 분위기가 흐른다. 에디는 신형 스포츠카를 사고 거대한 침실을 가질 정도로 성공했음에도 강박적으로 술과 마약을 한다. 에디뿐 아니라 그의 파트너인 메기 역시 불안할 때면 현실을 잊으려고 코카인을 한다. 왜 이들은 허무해할까? 어떤 가치가, 목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에디는 스타를 동경해 포르노 사업에 뛰어들지만, 어떤 스타가 되고 싶은지, 왜 되고 싶은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저 어리숙한 논리로 포르노 사업이 교훈적이라고 옹호할 뿐이다. 잭 호너 역시 ‘예술 작품’을 찍는다고 주장하지만 자기 스스로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비디오 업자가 와서 계약을 제안할 때, 시덥지 않은 이유를 대면서 화를 낸다. 메기도 돈을 벌지만 그 돈을 벌어서 어디다 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포르노를 찍을 뿐이다. 그렇게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과 가치를 상실한 채, 시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간다. 이따금씩 자신이 잘못된 삶을 살고 있다는 의문이 들 때는 마약으로, 술로 잊으려고 발버둥 친다. 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일까? 우리는 그들처럼 부자도 아니고, 한국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닌데 말이다. 이쯤에서 당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생각해보자. 당신은 무작정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가 없었는가? 남미라든지, 인도라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제주도라도. 왠지 모르게 구질구질한 일상을 떠나서. 아니면 가끔 멍하니 카페 밖을 바라보면서 세상은 저렇게 잘 굴러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아픈지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는가? 세상 속에서 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가? 가끔 보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신문과 시사in을 덮어본 적이 없는가? 달콤한 거짓말인지 알면서도 믿고 싶었던 적이 없는가? 이렇게 사실, 우리도 도망치고 있지 않는가? 2. 가족 같은 그러나 가족은 아닌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해도 허무는 쉽게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우연찮게도 상실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게 해주는 순간이 찾아온다. 바로 타인이 그들에게 다가올 때다. 그것이 진짜 가족이든, 친구 혹은 연인이든 그들은 타인을 통해서 자신의 외로움과 절망을 위로한다. 가족처럼 말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2개가 있다. 첫 번째는 ‘포르노 부족’들의 파티 장면이다. 포르노 부족은 감독인 잭 호건을 중심으로 매번 그의 집에서 파티를 여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들을 부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잭 호건을 중심으로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들 부족 속에 속하게 되면서 에디는 안정을 느낀다. 사실 에디는 매번 경제적 문제로 다투는 부모님과 자신에게 쏟아지는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가출한 상태다. 삭막한 가정에서 성장했던 에디에게 아버지와 같은 잭 호건의 조언과 자신을 ‘아들’이라고 부르는 메기는 화목한 가정을 느끼게 해준다. 두 번째는 메기가 자신이 낳은 앤드류를 보기 위해 소송을 하는 장면이다. 메기는 남편과의 이혼 후에, 양육권 조정을 통해 매주 주말에 ‘적절한’ 집에서 앤드류를 만날 수 있다는 합의를 했다. 그러나 앤드류를 만날 수 있는 그녀의 자격이 박탈당해, 이것을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건다. 법정에 출두하여, 남편이 ‘포르노를 찍는 여자’라는 조롱에도, 판사 앞에서 열심히 자신을 변론한다. 하지만 결국 판사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린다. “마지막으로 체포되신 게 언제죠?” 왜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닮았는가? 아마 연애를 하고 싶은 솔로의 사례를 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언젠가 아는 형에게 왜 연애를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그러자 돌아오는 대답이 “삶의 질이 올라가잖아.”였다. 이 말을 그때만 들었던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왜, 연애하면 재미있잖아?” 우리는 남과 무엇을 한다는 것, 아니면 그저 남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조금은 유쾌해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가족이든 아니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3. 추락 그리고 용기 거품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세상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공에 취한 사람들은 이를 짐작하지도 못하고, 설령 안다고 해도 인정하지 않는다. 에디 역시 마찬가지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디오의 등장으로 포르노 극장은 몰락한다. 그 때문에 에디 역시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에디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급기야 감독인 잭 호너와 싸우고 그의 집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이것저것 시도하지만 돈을 탕진하기만 할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슈퍼스타야.”를 되뇌며 매일 코카인만 하다 거시기마저 발기 부전에 걸려버린다. 그런 그가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선택한 것은 무장 강도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과 마약상의 집을 털러 간다. 그러나 동료 중 한 명이 계획을 넘어선 욕심을 부려 총격전에 휘말린다. 친구는 죽고, 에디와 남은 친구만이 허겁지겁 그곳에서 도망친다. 다음날 아침 그는 잭 호너에게 찾아가 자신을 다시 영화에 써주면 안 되겠냐며 애원하고, 잭 호너는 그런 그를 받아들인다. 에디가 거울 속의 자신에게 “넌 최고야.”라고 말한 다음, 포르노를 찍으러 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앤더슨도 결국 명쾌한 해결책을 내리지는 못한다. 의미가 없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표류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영화 <부기나이트>에서는 그저 추락한 현실에서 표류하던 에디가 도망가지 않고, 다시 그 지난한 현실로 용기있게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 후, 앤더슨의 최근작인 <더 마스터>에서는 에디가 보여주지 못한 ‘어떻게 의미를 찾을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의 의미는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이 무의미하더라도 끝조차 무의미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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